<CTS TV QT에서 옮겨왔습니다>
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1절).
이는 곧 사무엘의 위상과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널리 미쳤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엘리 제사장이 살아 있었음에도 이미 사무엘의 존재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한 사람의 내면에 얽혀있는 복잡다단한 면모에서 어느 한 가지만을 뽑아내어 이게 이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며 수시로 별 곤란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그것도 거의 단정적으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판단해버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가령 누군가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 언제나 그 사람을 그런 측면에서만 파악하려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상대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인가는 더 이상 알려고도 않습니다. 아직 상대방의 삶 속에서 내가 보지 못한 또 다른 내면의 세계가 있음을 절대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이야 말로 어느 시대나 우리 인간들에게서 거의 피하기 어려운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그의 때가 아니었음에도 사무엘에 대한 백성들의 긍정적인 평가는 갈수록 그 관성이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엘리의 모습은 더욱 왜소해지고 기력은 쇠하여 애초의 열정은 간 곳 없이 사라졌으며 총기 있는 분별력은커녕 편견과 일그러진 지도력에 그 존재감 자체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그는 노쇠한 심령으로 이스라엘에 장애가 되고 짐이 되고 있었으며, 백성들에게 미래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고 꿈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부담과 거침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은 어렸음에도 그의 말이 온 이스라엘 사회에 전파되었던 사무엘처럼 믿는 자들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형제들, 이웃들에게 언제나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생기를 전해야 합니다.
지금도 <코로나19>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믿음을 말해야 합니다.
일찍이 사무엘은 그렇게 백성들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에벤에셀>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언약궤를 동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3절)?
-당시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에게 패한 이유를 적어보십시오(2절).
주님, 모세는 120세에도 눈빛이 총명하고 기력이 정정한 청년의 모습이었다고 하는데 엘리 제사장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직 어린 나이에도 온 이스라엘이 그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며 그의 지도력을 용납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희들 고령의 엘리 제사장과 약관의 사무엘 선지자를 보며 깨닫고 배우고 저희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