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S TV QT에서 옮겨왔습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1절).
보아스는 룻과의 결혼을 마음 먹었습니다. 사실상 룻에게도 이미 약속했습니다(3:11). 다만 엘리멜렉 가문에는 룻의 남편 말론에게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어 그가 1순위였으므로(3:12) 그 사람이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포기하겠고 하면 자신이 룻을 맞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3:12-13).
나오미나 룻은 보아스보다 더 가가운 친족이 있었음에도 왜 처음부터 그를 시형제 결혼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보다는 좀 더 먼 보아스를 염두에 두었을까요? 만일 그 <아무개>가 룻에 대해 기업 무를 자의 소임을 다하겠노라고 나섰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럼에도 본문에는 어디에도 그 점에 대한 불안감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나오미, 룻, 보아스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모종의 확신이 있었던 겁니다.
<성문>이란 곧 <성문 앞 광장>을 뚯하는 말로 그 곳은 백성들의 소송 문제나 여러 가지 어려운 사건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법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장로 열 명>은 유대 전통상 사법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증인으로 충분한 숫자였습니다. 열 명의 장로들 앞에서 그 <아무개>가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절)고 포기 선언을 합니다.
이렇듯 보아스는 자신의 문제를 성문에 가지고 나가 법정에 세움으로써 그 사랑을 더욱 강한 고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었고, 결국은 판결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도 보아스도 나오미도 룻까지도 모두 승리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진실을 믿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에 벅찬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변호인이 되심을 굳게 믿고 기다리면 결국은 그분의 의로움과 평화가 결코 우리를 패배하게 하지 않음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13과 4:4 말씀을 읽고 보아스의 올곧은 인품에 대해 적어 보십시오.
-옛 이스라엘 문화에서 <성문>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아는 대로 적어 보십시오.
-보아스가 성문에서 어느 엘리멜렉 근족에 대해 이름이 아닌 <아무개여!>하며 부른 이유는?
주님, 보아스는 실로 강직하고 원칙과 율법의 질서를 존중한 인격자였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자신의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굳이 룻과의 관계를 성문으로 가져가 법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은 패배의 위험 부담까지 안고서라도 그 길로 가는 것이 옳다고 확신했기 때문이고, 또 그런 절차와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에게도 그런 믿음, 그런 확신과 용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