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S TV QT에서 옮겨왔습니다>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지금 우리 사회는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큰 위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과정가운데 근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싸움과 미움이 아니라 기도와 화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최순실 딸 정유라의 글이 화제입니다.
“능력없으면 너희 부모를 원망해라…. 돈도 실력이다.”
그녀의 말은 세상에 어떤 가치관이 팽배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누리고 가지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합니다. 다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논란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표현이 참 비슷합니다. 바울이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으로 비유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어떤 사람은 금그릇 같은 사람, 어떤 사람은 은그릇 같은 사람, 어떤 사람은 질그릇 같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새리와 창녀들의 신앙을 무시합니다. 그들의 드리는 헌금도 그들의 드리는 기도도 자신들에 비하면 너무 하찮은 것이라고 비웃습니다. 사람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판단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중요한 것은 금그릇이냐, 질그릇이냐가 아니라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모습이 하나님께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좋은 그릇과 나쁜 그릇의 기준은 금으로 만들었나? 은으로 만들었나가 아니라 깨끗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그릇을 사용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깨끗한가?’ 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깨끗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며 ‘늘 겸손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그릇이 준비되었다면 중요한 것은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 입니다. 질그릇이라도 그 안에 보물을 담는다면 그것은 가장 귀한 가치를 가진 그릇이 됩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든 가장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 보물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을 담기 위해 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봐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주님을 담기 위해 비우고, 그 안에 주님을 담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바랍니다.
– 내 그릇을 깨끗하지 못하게 하는 불평과 교만이 있다면 회개하기 원합니다.
– 내 안에 주님을 담기 위해 먼저 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정작 나의 그릇을 더럽게 만드는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삶을 감사로 여기며 깨끗이 하여 주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